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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의 사상과 학문을 집대성한 '전습록'은 그의 제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역작이다. 이 책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왕양명의 철학과 교육 방법, 그의 생애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습록의 탄생과 치양지설와 지행합일설의 의미, 명나라 시대의 대유학자 왕양명에 대해 알아봅시다.
전습록 편찬
'전습록'은 왕양명이 살아생전에 완성시킨 책이 아니다. 왕양명이 남긴 것은 '논학어록', '논한 서학' 등의 단편뿐인데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이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이 전습록이다. 그래서 전습록을 완성하는 데 자그마치 3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습록은 상, 중, 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를 모아 전습록을 만들어 발간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제자 서애에 의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서애는 31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여 작업을 끝낼 수 없었다. 이를 이어 작업을 수행한 것은 또 다른 제자 설간이다. 서애의 작업을 이어 자신이 수집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모아 책을 내게 되는데 이것이 전습록 상권이다. 때는 1518년 왕양명이 47세 되던 때이다. 전습록 상권에는 여러 사람이 기록한 내용을 129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왕양명이 40대에 학문에 대해 논의한 논학어록이다. 그 후 다시 남대길은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수집한 왕양명의 학술 편지 8편과 교육에 대한 논문 2편을 묶어 전습록을 더하게 된다. 이것이 전습록 중권이고 왕양명이 53세 때였다. 왕양명이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다시 왕양명의 자료를 모아 책을 간행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전습록 하권이다. 때는 1556년 왕양명이 죽은 후 28년째 되던 해였다. 제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정성이 없었다면 이 책은 아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치양지설와 지행합일설의 의미
성리학은 송나라 주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런데 주자가 학문 활동을 하던 때에는 송나라가 몽고족에 의해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나던 때였다.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항상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한족이 이민족에 의해 쫓겨났다는 것은 보통 치욕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리학 대학자들은 주자의 학문에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배어 있다. 명나라는 이민족의 국가인 원나라를 뒤엎고 등장한 한족의 국가였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명나라가 주자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채용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주자학이 국가학으로 되면서 학문상에 나쁜 성향이 생겼다. 성리학은 점점 입신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되었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주자가 해석해 놓은 유교 경전을 암기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주자가 달아놓은 해설과 다르게 유교 경전을 해석할 경우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명나라 때에는 주자학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뜻있는 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경전을 보며 연구를 했다. 왕양명도 마찬가지였다. 왕양명은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이고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사상은 전습록에 잘 드러나 있다. 독특한 유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송나라 때의 주자학과 대비시켜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주자학과 다른 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첫 번째는 '치양시설'이다. 여기서 '양지'라고 하는 것은 맹자가 주장한 것으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말한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는 본능이나 물에 빠진 아이를 본 사람이 아무런 사심 없이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마음 등이 양지라고 할 수 있다. '치'라는 말은 '대학'에 나오는 '치지'에서 따온 것이다. 왕양명이 표현한 바를 보면 양지란 마음을 말하는데 깊숙한 곳에서 존재하는 실천적 판단력, 날카로운 윤리적 감수성, 행위의 자율적 규범 등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인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지행합일설'이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시간상의 선후 문제가 결코 아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원래 하나로 합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두 가지 주장을 통해 유교 경전을 가지고 열심히 알아가고 지식을 추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명나라 시대의 대유학자 왕양명
왕양명은 명나라 시대의 교육자이며 정치가인 대학자이다. 중국의 유가 사상 중에서 송나라 때에 주자학 즉, 성리학이 명나라 때는 양명학이 대표적이라고 배웠다. 또 양명학은 주자학과는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사상이라고 배웠다. 주자학도 양명학도 모두 그것을 집대성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양명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왕양명이다. 왕양명의 생애는 보통 3기의 시기로 나눈다. 이는 그의 사상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또 관리로서의 삶에서도 뚜렷하고 구분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제1기는 1세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는 27세까지의 시기이다. 제2기는 관직에 나가 활동을 하면서 모함을 받는 귀양살이를 하는 28세부터 44세까지의 시기이다. 제3기는 중요한 관직에 가용되어 활동하다가 끝내는 군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45세부터 57세까지의 시기이다. 제1기 시절은 왕양명이 널리 공부하고 굳세게 뜻을 세우는 기간이다. 왕양명은 이때 단순히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나 도교의 경전을 광범위하게 독서하게 된다. 이렇게 널리 독서하는 경향은 왕양명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뜻이 있는 학자들이라면 다 그렇게 했다. 당시의 유학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양명은 불교나 도교를 비판하면서 유가 사상을 굳세게 옹호한다. 불교는 인간 세상을 멀리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왕양명에게는 비현실적인 사상으로 보였다. 도 도가 사상은 장생술, 치병술 등의 성격을 지닌 세속 신앙으로 미신적 요소가 많은 비합리적인 사상으로 보였다. 이렇게 학문에 대한 정진 속에서 왕양명은 자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고 관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제2기는 그가 28세에 과거에 급제하면서 시작된다. 관리가 된 왕양명은 여러 관직을 전전하면서 자신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해 간다. 당시 명나라 정치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몇몇 권세 있는 신하와 간신들이 정권을 쥐고 흔들었고 환관 세력이 가세를 하여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조선 중기 이후 양반들이 권련 투쟁을 하던 상황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뜻이 높고 곧았던 왕양명은 35세 때에 썩어 가는 명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 보고자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왕양명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권력을 쥐고 있던 세력에 의해 귀주로 좌천되게 된다. 이때가 왕양명에게는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다. 다행히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삼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시기로 만들기도 했다. 변방 지역의 일반 백성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정통 유가 사상에서 더욱 멀리 떨어져 고민할 수도 있었다. 제3기는 왕양명이 45세가 되었을 때 강서 지역, 푸젠 성 등의 순무가 되어 활동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등의 공적을 세우게 된다. 학문적으로도 더욱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양명은 57세의 나이로 군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왕양명이 50여 년의 생애를 살면서 헌종 등 4명의 왕을 거쳤는데 이는 당시 정치가 불완전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적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감명 깊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