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순자의 성악설

    순자의 사상은 인간 본성의 악함을 강조하며 이를 예의와 도리로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대비되며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인간이 지혜와 덕을 갖출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순자'의 성악설과 동서양 사상사의 거장과 직문의 학자인 순자에 대해 살펴봅시다.

    순자의 성악설

    '순자'에 실려 있는 내용은 많다. 주장하는 사상 중 하나는 전통 유가의 사상을 계승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한다. 맹자와 순자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도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다르게 파악했던 것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악한 것이 어디에 있고 선한 것이 어디에 있겠냐는 것이다. 부모의 형질은 유전자를 통해 자식에게 유전된다는 의미로 성격이 악한 부모에게서 난 자식은 본성이 악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그 말에 대해 한 번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생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고 인간 본성의 원래 고유한 그 무엇을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원래 악하다고 주장한 이유를 알아보자. 무엇보다 순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즉,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모습 그대로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또 전국 시대처럼 약육강식의 시대에는 악한 인간의 모습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다. 순자가 정말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방법으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예의로써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예의를 통해 규제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나 학습하고 노력하면 지혜와 덕이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치열하고 어지럽던 시기에 이러한 사상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표현했던 점이 놀랍다.

    동서양 사상사의 거장

    순자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순자'라는 책이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순자'는 32편으로 한나라 유향이 교정을 한 것이다. 유향이 손을 보기 전에 '순자'의 정식 이름은 '순경신서'로 원래는 322편에 달했는데 중복된 것을 피해 정리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순자'이다. 순자의 글은 보기 드물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다. '논어'와 '맹자'는 대화체로 되어 있고 '도덕경'은 운문체로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장자'는 우화 형식으로 된 글이 많다. 이에 비해 '순자'는 체계적으로 써 내려간 논문 모음집 같다. 대화체의 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자신의 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쓴 글이 대부분이다. 비교적 빠진 분야가 없을 정도로 전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순자를 읽는 사람들은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에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믈론 이 때문에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좀 지루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유가, 묵가, 도덕가의 실천상의 장, 단점을 논하여 핵심을 습득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순자를 가리켜 중국의 고대 사상을 종합해서 집대성한 학자라고 표현한다. 일찍부터 순자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부터 예술론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우월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여 생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문제의 제기 방식이나 논증하는 방식이 '순자'에 나와 있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책의 일부가 비슷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순자가 중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직문의 학자 : 그가 남긴 사상과 교육

    순자는 맹자와는 약간 다르면서도 맹자 이후 유기를 계승한 대학자이다. 그가 구체적으로 언제 태어나서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289년 무렵에 태어나서 기원전 238년 무렵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전국 시대가 막 끝나가는 바야흐로 중국의 통일이 무르익어 가는 시기의 대사상가였다. 전국 시대에는 가장 막강한 나라 7개국이 서로 자웅을 다투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였다. 학자들에 대한 우대와 관련하여 제나라는 직문의 학자들로 유명하다. 제나라의 위왕, 선왕, 민왕은 수백에서 천여 명에 달하는 학자들을 수도에 불러들여 학문 연구에 종사하도록 했다. 이때 학자들이 모여 있었던 곳이 수도 임치의 직문이었고 그 학자들을 가리켜 '직문의 학자'라고 했다. 순자가 조나라에서 제나라고 갔을 때 그도 역시 직문의 학자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 학자들 중 순자는 나이가 가장 많고 학덕도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직문의 최고 학자들이 맡는 좨주라는 벼슬을 세 번이나 지냈다. 좨주는 신분 체계에서 대부 정도에 해당하는 명예직이었다.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부어 제사를 지내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자리이다. 하지만 순자의 제나라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제나라에서 순자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자는 제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간다. 그런데 당시에는 진나라만 빼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몇몇 왕족 또는 권세가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능군, 초나라의 춘신 군이다. 자신들이 가진 제력을 바탕으로 천하의 이름난 학자들을 초빙하여 수천 명에 달하는 식객들을 거느렸다. 순자가 제나라에서 초나라로 갔을 때 그를 받아 준 사람이 바로 재상춘신군이었다. 춘신군은 순자의 학덕을 인정해서 순자를 난릉이라는 곳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난릉에 계속 머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면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정확한 순자의 생사를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과 사상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