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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민심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는 지침서로, 그의 유배 생활과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담겨 있다. 관리자들이 현명하게 행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정약용의 깊은 사유와 학문적 성취가 반영된 작품이다. 목민심서의 해설과 정약용의 저술 세계, 삶과 업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목민심서 해설

    '목민심서'는 주로 지방 정치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주된 독자층은 지방에서 정치를 하는 관리들이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지방에 있는 관리들이 백성을 다리스리는 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만든 지침서이다. 정약용 자신의 관리 생활 경험과 18년 유배 생활 동안의 현실 분석, 방대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저술한 것이다. 여기에 지방 수령이 임명을 받는 과정에서부터 부임하여 각 분야의 행정을 담당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각 지방의 수령이 현행 법 제도 아래에서 최선을 다하면 실행 가능한 각종 정책도 제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책의 분량도 상당히 많다. 우수한 학자들이 모여 10년 넘게 번역을 한 값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전문 연구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다 읽어 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주 큰 마음을 먹지 않는 한 말이다. 목민심서는 자서를 빼면 부임에서 해관까지 모두 12부로 구성되어 있다. 또 각 부마다 6조로 나누어진 세부 항목이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모두 72조가 된다. 정약용은 자신이 직접 쓴 서문 즉, 자서에서 당시 조선의 관리들의 행실을 한탄한다. 관리들 행태를 바로 잡기 위해 그리고 이들에게 새로운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이 이 책을 저술함을 암시하고 있다. 책의 이름을 왜 목민심서라고 지었는지 살펴보자. 심서의 뜻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마음으로 쓴 책인 것이다. 유배 중인 자신의 심정을 책의 이름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목민심서를 읽을 때 내용을 꼼꼼하게 검토하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면 정약용의 마음을 더 깊숙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의 삶과 업적

    다산 정약용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간 위대한 사상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가 살았던 조선 중, 후기 사회는 여러 가지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위해 꿈틀거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경제는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과 그 후 곧이어 다시 일어난 병자호란은 조선의 농토를 황폐화시켰고 산업을 마비시켰다. 이 때문에 두 번의 전란이 끝난 후 일반 민중들은 경제를 다시 회복시켜야 하는 힘든 과제를 떠맡아야 했다. 그런데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생산력의 발전과 새로운 산업의 부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농업에서는 새로운 모내기 법이 등장하여 노력은 적게 들이고도 생산량은 훨씬 높일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영조, 정조 시대의 문예부흥기를 맞이했다. 영조는 양반 정치 세력들의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전에는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정치 세력들도 관리로 등용되었다. 정약용의 아버지도 바로 이로 인해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이 탕평책을 더욱 확대 실시하여 정약용 같은 실학파 인물들을 대거 중용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정조가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아꼈다.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가로서 경력을 쌓아간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정약용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천주교 사건으로 인해 신유사옥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게 되고 전라남도 남쪽 끝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 지역에 있는 학자들과 일반 민중들이 도와주어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나게 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지내며 여생을 마무리한다.

    저술 세계

    정약용은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편지를 썼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살펴보면 유배 생활 중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글을 읽고 글 쓰기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또 정약용이 학문하는 자세와 책 쓰는 태도에 대해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한말 대학자였던 정인보 선생은 정약용의 학문 활동을 평가하여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표현했다. 약 10년 동안 관직 생활과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포함한 생애를 통해 정약용은 5백 권의 책과 약 2천5백 편의 한시를 남겼다. 또한 정약용이 연구한 분야도 엄청나게 방대하다. 철학, 역사,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지리, 농업, 건축, 의학 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 분야 중 빠진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가 쓴 책 5배 권 중에서도 정약용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책이 바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책을 칭하여 2서 1표라고 한다. 이 중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는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하던 말년에 지은 것이다. 그리고 흠흠신서도 유배가 풀린 후 집에 돌아온 다음에 출간한 것이다. 사실 주된 내용은 이미 유배 생활 중에 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정약용의 유배 생활은 그의 개인적인 삶을 보았을 때는 불행이었지도 모르지만, 우리 민족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행운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엄청난 책들은 유배 생활이라는 비교적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쓰였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이 책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 책들을 어떻게 보면 일련의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