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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은 동학의 철학과 실천 방안을 담은 경전으로, 최시형이 최제우의 글을 모아 발행했다. 이 책은 동학의 교리를 한문과 시로 풀어내며, 당시 사회의 혼란을 진단하고 천주교와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을 통합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 동경대전의 심층 분석과 동학 혁명의 뿌리 그리고 최제우의 깨달음에 대해 확인해 봅시다.
동경대전 심층 분석
'동경대전'은 동학, 천주교의 교주 최제우의 가르침을 한데 묶은 경전이다. 동경대전에는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독특한 신흥종교의 사상적 흔적이 나타나 있다. 백성들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부적, 주술과 같은 민속신앙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동학이 기존의 종교에 대해 비판하는 이유와 배경을 말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동학이 단지 조선 시대 말기의 수많은 신흥종교의 하나가 아니듯이 동경대전 역시 단순한 종교 경전이 아니다. 동경대전은 동학이란 종교의 경전이면서 동시에 19세 말의 시대적 상황에서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방향을 제시한 지침서였다. 그래서 동경대전의 사상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담겨 있다. 동경대전에는 당시의 국내 정세와 국제 정세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담겨 있다. 그리고 백성들의 건강을 근심하며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동학이 제시한 인내천과 보국안민, 후천개벽 사상은 하나의 종교적 교리이자 동시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동학이 사회 개혁을 기치로 등장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동경대전과 동학을 통해 18세기말 조선의 개혁 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세력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 혁명의 뿌리
'동경대전'은 '용담유사'와 더불어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주 최제우의 글을 모아 포교의 지침으로 발행한 것이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내용상 중복이 많은데 주로 동학의 철학적 기반과 내용을 한문으로 저술한 글들을 동경대전, 그리고 시와 노래의 형태로 된 글들은 용담유사에 실려 있다. 그리고 동경대전은 글을 아는 선비 등을 대상으로 했고 용담유사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동경대전에는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등 4편의 글과 주문, 각종 시구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동경대전은 무엇보다 당시의 국내 정세와 국제 정세를 명확하게 진단하면서 동학의 출발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동학의 종교적 수행 원칙을 짧은 시구로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임을 알기 쉬운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하늘의 도리를 깨달아 가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많은 백성들은 최제우의 이러한 가르침으로부터 신분 차별과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도리는 마침내 1894년 동학 혁명, 갑오농민혁명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쉽지 않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이 있었을 테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동경대전을 만들어 낸 것이 감탄스럽다.
최제우의 깨달음
동학의 교주인 수운 최제우는 1824년 경북 월성군 혁곡면 가정리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제선이었으나 나중에 어리석은 세상을 구한다는 뜻을 지닌 제우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최제우가 태어난 조선 시대 말기의 상황은 심각한 사회 혼란기였다. 잦은 당파 싸움과 세도 정치의 와중에서 국교인 유교적 질서는 무너지고 관리들은 백성들을 것을 강제로 빼앗으며 자신들의 뱃속 채우기에 바빴다. 지배 계급인 양반 계층은 한편으로는 몰락한 양반층이 많아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돈 많은 상민들이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가의 기본 질서가 무너지면서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는 등 전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혼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당시의 몰락한 양반 가문이 그러하듯이 매우 어렵게 생활했다. 1859년 10월경 최제우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구미산 밑 용담정에서 살게 된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백성들의 힘든 상황을 생각하며 도를 얻기 전에는 산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이름을 개명한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평범한 아들이 이제 세상을 구하는 도리를 깨닫고자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게 된다. 6개월 정도가 지난 1860년 4월 5일 깨달음을 얻게 된다. 1년여 기간 동안 자신을 정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동학이라 부른다. 동학이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하자 최제우를 헐뜯는 주장도 많아지게 된다. 최제우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전라도 쪽으로 피신한다. 피신하는 동안 자신의 과거 활동을 반성하고 동시에 자신의 가르침을 보다 명료하게 하는 글을 쓴다. 포덕문, 논학문 등 동경대전에 실려 있는 주요 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였다. 어지러운 시기에 훌륭한 글을 써낸 최제우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