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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대승기신론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관과 유식 사상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밝히는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1300년 넘게 한국 불교의 뿌리가 되어 왔다. 대승기신론소의 체계와 원효의 불교 철학과 중생 구제을 의미하는 화쟁 사상, 해동 불교의 시조인 원효대사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살펴봅시다.

    대승기신론소 철학

    대승기신론은 불교 문학 중 뛰어난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구성의 치밀함과 정확하고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 체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마명대사가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지은 것인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유신론적 입장에서 대승 불교의 중관파와 유식파의 견해를 통합 지양해 깨달음과 중생들의 삶이 하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원효대사는 이 책을 접하자마자 바로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음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다섯 가지 종류의 책 7권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주요 책들 중 혜원, 원효, 법장의 것을 3대 소라 하는데 그중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가장 높게 평가받고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첫째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 사상과 유식 사상의 지양 종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마음의 청정한 면만을 주로 찬양하고 강조해 온 중관 사상과 마음의 오염된 면을 주로 밝혀 온 유식 사상이 잘 조화를 이루어 부처의 가르침을 밝힌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원효는 인도의 불교 현실을 주목하고 지양하는 방향에서 해석한 것이다. 둘째 대승기신론은 유식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8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그중 가장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 불렀다. 이러한 5가지 식별은 제6 식인 의식에 의해 통합되며 이 의식은 보다 깊은 곳에서 나라는 의식을 내용으로 하는 뿌리 깊은 의식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쉽게 말해 자아의식이라는 것이다. 제7식 즉 자아의식은 보다 심층의 제8식에 연결되어 있는데 제8식은 사람의 마음속 깊숙이 감춰진 모든 심리 활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보통 사람들은 제8식이 순수하게 맑고 깨끗한, 참되고 한결같은 본연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좋지 않은 버릇의 힘으로 뒤덮여 있다고 보았다. 셋째 원효는 깨달음의 상태는 자기 자신과 베푸는 삶의 두 가지 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깨달은 상태에 안주하지 말고 널리 알리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원효는 단지 모든 것을 단순히 절충시키는 것이 아닌 불교 사상의 근본적 진리에 입각해 뚜렷한 일관성으로 주요한 논쟁점을 밝혔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소를 읽으면서 원효 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 되었다.

    화쟁 사상: 원효의 불교 철학과 중생 구제

    원효의 특이한 인생 여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원효의 사상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원효의 사상은 1300여 년이 넘는 한국 불교의 뿌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다. 원효의 사상은 불교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그의 모든 저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그의 십문화쟁론은 그의 화쟁 사상을 펼쳐 보인 가장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원효가 주장한 화쟁의 원리는 화엄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화엄 사상이 석가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는 최고라고 보면서 그 속에서 편견과 대립이 없는 원융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중생의 심성은 허공이나 바다와도 같은 것이고 이 때문에 깨끗하거나 더러운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행의 공덕을 쌓지 못한 사람이 긴 꿈에서 깨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흐린 강을 따라 흐르는 중생들을 위해 아미타불은 저 극락정토에서 다정하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효의 입장은 그의 화엄 사상과 화쟁 사상으로부터 나온다. 사람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들은 자신의 처지에 맞는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효의 사상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철학적 기초를 닦은 것이다. 중생 구제를 위한 그의 파격적 실천과 더불어 커다란 힘은 대단하고 느껴진다.

    해동 불교의 시조, 원효대사의 파란만장한 삶

    원효대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 사상가로서 해동 불교의 시조이다. 거침없는 자유로움과 중생 구제를 위한 삶을 살다 간 지도자였다. 원효는 남다른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나중에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깊은 뜻을 깨닫기까지 특정한 스승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러 스승을 찾아다녔다. 의상대사와 함께 고구려의 고승이었던 보덕화상 밑에서도 있었으며 영취산의 낭지 스님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이름난 산의 훌륭하고 경치 좋은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했다고 한다. 원효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모든 정열을 바쳤고 이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산속에서 수행하면서도 불교학뿐 아니라 유학과 도교의 서적들도 두루 읽어 학문적 깊이를 쌓았다. 그의 학문은 신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30세 무렵 당대의 고승인 혜공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독특한 행동거지로 유명한 혜공 스님은 항상 삼태기를 걸머지고 다니면서 노래하거나 춤을 추기도 하고 신기한 힘을 발휘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혜공 스님은 원효 스님의 깊은 학식을 놀라기도 했지만 학식을 뛰어넘어 어떤 장애에도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도록 가르쳤다. 이후의 원효의 파격적인 삶은 이때 혜공 스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원효는 34세 되던 해 의상과 함께 현장법사에게서 유식학을 배우고 자 당나라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요동까지 갔다가 첩자로 몰리는 바람에 그곳 병사들에게 붙잡혀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 나 돌아온다. 그 뒤 40세를 전후로 다시 당나라로 간다. 배를 타려고 서해 쪽으로 가다가 원효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숭고 승전과 임간록에 기록되어 있고 민간 설화로 구전되기도 한다. 원효의 파란만장하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해 나 자신도 돌이켜 볼 수 있었다.